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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왕가위의 독보적인 미장센, <중경삼림>

by 두부정식 202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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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경삼림 포스터

스쳐 지나간 0.01cm의 거리 — <중경삼림>을 제대로 보는 법

1994년, 왕가위 감독은 대작 <동사서독>의 후반 작업이 지지부진해지자 잠시 숨을 돌릴 겸 단 23일 만에 즉흥적으로 영화 한 편을 완성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중경삼림>(重慶森林)은 오히려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죠. 제목의 '중경'은 홍콩 침사추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낡은 주상복합 건물 '청킹맨션'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이 영화를 처음 보시는 분, 혹은 오랜만에 다시 보시려는 분 모두를 위해 어떤 부분을 눈여겨보면 좋을지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촬영 당시 홍콩의 공기 — 반환을 3년 앞둔 도시

영화 중경삼림 중 거리를 걷는 장면

<중경삼림>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배경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997년 홍콩 반환을 3년 앞둔 시점이라는 점입니다. 1984년 중영 공동선언으로 반환이 확정된 이후, 홍콩 사회는 낯선 체제로 편입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혼란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 많은 홍콩 시민들이 캐나다나 영국 등으로 이민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왕가위 감독 스스로도 이 영화와 이듬해 작품 <타락천사>를 만들게 된 계기로 '아비정전'과 '1997년'을 언급한 바 있는데, 평론가들은 그 행간에 실제로는 톈안먼 사태와 홍콩 반환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이름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고, 서로 스쳐 지나가듯 만났다가 헤어지는 방식, 그리고 유통기한이라는 소재에 유독 집착하는 설정 모두 이 시대적 불안을 개인의 고독과 사랑이라는 사적인 언어로 풀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임청하가 연기한 금발 가발의 마약 밀매상을 두고, 인도인들을 이용하면서도 백인 남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설정이 아편전쟁 이후 홍콩을 지배해 온 영국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을 만큼, 이 영화는 언뜻 가벼운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흡수한 작품입니다.

두 개로 나뉜 이야기, 그러나 하나의 정서

영화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실연을 겪은 경찰이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같은 패스트푸드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가 배경으로 겹치지만 인물들은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이 옴니버스 구조 자체가 "대도시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서로를 스쳐 지나가지만, 결코 서로의 삶에 온전히 닿지 못한다"는 영화의 정서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습니다.

1부: 경찰 223과 유통기한이 있는 사랑

영화 중경삼림 중 금성무와 임청하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복 경찰 하지무, 극 중 번호로는 223번(금성무)입니다. 만우절에 연인 메이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은 그는 그것이 거짓말이길 바라며, 자신의 생일이자 이별 한 달째 되는 5월 1일까지 그녀를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그 기다림의 방식이 독특한데, 메이가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 중에서도 유통기한이 정확히 5월 1일까지인 제품만 골라 매일 하나씩 사 모으는 것입니다. 편의점에서 다음 날 유통기한이 지나는 통조림을 팔지 않겠다는 점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그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자신은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대사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막이나 이후 나온 오마주 작품들의 영향으로 이 대사가 흔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와전되어 알려져 있는데, 실제 원 대사는 사랑이 아니라 '기억'에 유통기한이 없기를 바란다는 내용에 더 가깝습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 미묘한 차이가 오히려 이 영화 전체가 다루는 정서, 즉 사랑 자체보다는 그 사랑이 남긴 기억과 잔상에 더 오래 붙들려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더 정확히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임청하가 연기한 이름 없는 금발 마약상은 이 에피소드의 또 다른 축입니다. 배신한 밀매 조직원들에게 복수하는 그녀와,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려 낯선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기로 다짐하는 223이 우연히 술집에서 만나며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건 하룻밤의 감정이지만, 다음 날 223이 받은 생일 축하 메시지 하나로 이 짧은 만남은 그의 기억 속에 꽤 오래 남을 여운을 남깁니다.

2부: 경찰 663과 몰래 찾아오는 사랑

영화 중경삼림 중 양조위와 왕페이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경찰 663(양조위)입니다. 스튜어디스였던 연인과 헤어진 그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페이(왕페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페이는 663 몰래 그의 집 열쇠를 손에 넣어 청소를 하고, 가구를 바꾸고, 어항 속 금붕어까지 새로 채워 넣으며 그의 일상 속으로 조용히 스며듭니다. 정작 663은 한동안 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서서히 페이의 존재를 눈치채기 시작합니다.

페이는 자유로운 캘리포니아를 동경하며 언젠가 이곳을 떠나겠다는 꿈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스튜어디스가 되어 훌쩍 홍콩을 떠나고, 663에게는 손으로 쓴 탑승권 한 장만을 남깁니다. 1년 뒤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페이는 그사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아예 인수해버린 663과 재회하고, 그가 건넨 새 탑승권을 손에 쥐며 영화는 열린 결말로 막을 내립니다. 어디로 데려가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함께 가보자는 취지의 663의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가 그리는 사랑의 방식이 확신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영화를 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연출 포인트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과 함께 완성한 이 영화의 비주얼은 왕가위 특유의 스타일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힙니다. 특히 223과 마약상이 인파 속에서 처음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두 사람만 선명하게, 주변 행인들은 흐릿하게 흘러가도록 처리한 스텝 프린팅 기법으로 촬영됐습니다. 감독 스스로 이 장면에 대해, 영화는 수 세기를 몇 초로 압축할 수도, 짧은 순간을 몇 시간처럼 늘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이 기법이야말로 그 시간 감각의 왜곡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지점은 실제 로케이션입니다. 청킹맨션과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처럼 홍콩의 실제 거리와 건물을 거의 그대로 활용했는데, 이는 이 영화가 판타지가 아니라 당시 홍콩이라는 도시의 공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 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배우들의 즉흥적인 리액션, 핸드헬드 카메라의 흔들림, 네온사인이 만들어내는 색감의 번짐까지 모두 계산된 것 같으면서도 우연히 포착한 순간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만의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빼놓을 수 없는 OST — 캘리포니아와 몽중인

영화 중경삼림 중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음악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2부 내내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은 페이가 동경하는 자유롭고 먼 곳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는 곡으로 쓰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곡은 영화 개봉 이후 뒤늦게 큰 인기를 얻어, 이미 활동을 중단했던 마마스 앤 파파스가 1996년 내한 공연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몽중인(夢中人)'은 이 영화를 대표하는 곡으로 꼽힙니다. 아일랜드 밴드 크랜베리스의 'Dreams'를 광둥어로 번안한 곡인데, 원곡보다 오히려 이 영화의 정서와 더 깊이 맞닿아 있어 한국에서도 원곡보다 이 버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두 곡 모두 영화와 무관하게 먼저 발표된 곡들이지만, <중경삼림>에 삽입된 이후로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자동으로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른다는 사람이 많을 만큼 강렬한 싱크로율을 자랑합니다.

마치며: 우리는 매일 누군가와 스쳐 지나간다

<중경삼림>은 거창한 사건도, 복잡한 서사도 없는 영화입니다. 그저 대도시 속에서 실연을 겪은 두 남자, 그리고 그들 곁을 스쳐 가거나 조용히 머무는 두 여자의 이야기일 뿐이죠.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이 영화가 여전히 세련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 감정이 남긴 여백과 스침의 순간들만을 정직하게 담아냈기 때문일 겁니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가장 불안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역설적으로 가장 오래도록 사랑받는 홍콩 영화로 남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다시 보신다면, 이번엔 대사보다 음악에, 사건보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에 조금 더 귀 기울여 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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