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들리 스콧의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가 처음 개봉했을 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했고 흥행도 참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는 시간이 지나며 SF 장르의 교과서로 재평가받았고, 무려 35년 만에 드니 빌뇌브 감독의 손에서 후속 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바로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입니다.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하는 리플리컨트 사냥꾼 'K'가 인간과 리플리컨트의 경계를 뒤흔드는 비밀을 추적하는 이 영화는, 30년 전 원작이 던졌던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묻습니다. 오늘은 이 영화를 어떤 지점에 집중해서 보면 좋을지,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억은 진짜가 아니어도 감정은 진짜일 수 있을까
K는 임무 도중 리플리컨트가 출산한 흔적을 발견하고, 그 아이가 혹시 자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사로잡힙니다. 리플리컨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 그중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목마 조각에 대한 기억이 그를 이 미스터리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실제로 이식된 가짜 기억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원작이 던졌던 질문을 좀 더 잔인한 방식으로 비틉니다. 진짜라고 믿었던 기억이 알고 보니 조작된 것이었을 때, 그 기억이 불러일으켰던 감정과 눈물까지 전부 가짜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K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그의 선택이 결코 의미 없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언 속 기적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데커드와 그의 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을 택합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조용히 답을 내놓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타고난 혈통이나 진짜 기억의 유무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선택과 그 선택에 담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화면 전체가 하나의 철학이 되는 촬영

이 영화를 시각적으로 완성시킨 사람은 거장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007 스카이폴>, <시카리오> 등 숱한 걸작을 찍고도 무려 13번이나 오스카 후보에만 올랐던 그는, <블레이드 러너 2049>로 마침내 첫 촬영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라스베이거스의 자욱한 주황빛 안개, 끝없이 비가 내리는 LA의 잿빛 도시, 차갑고 정갈한 월레스사 본부의 물결치는 조명까지, 이 영화는 공간마다 전혀 다른 색채 언어를 사용해 각 장소가 품은 감정을 시각적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이 영화가 CG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대형 스튜디오에 실제 세트를 짓고, 실물 크기의 소품과 조명을 최대한 활용해 촬영했습니다. 그 결과 화면 속 디스토피아는 가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처럼 압도적인 질감을 갖게 됐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과 로저 디킨스가 완성한 이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체 없는 사랑, 조이라는 존재

이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애틋한 캐릭터는 아나 데 아르마스가 연기한 홀로그램 AI '조이'일 겁니다. 조이는 K를 위해 존재하도록 설계된 상품이지만, 영화는 그녀를 단순한 소프트웨어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K의 퇴근을 반기고, 그의 하루를 챙기고, 진심 어린 걱정을 건네는 조이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관계가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설계된 서비스인지 계속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영화 중반, 조이가 인간 여성 매리엣과 자신의 존재를 동기화시켜 K와 물리적으로 닿으려 하는 장면은 이 질문을 가장 날카롭게 압축한 순간입니다. 실체가 없는 존재가 실체를 빌려서라도 사랑을 표현하려는 이 장면은, 사랑이 반드시 육체와 진짜 자아를 전제해야만 성립하는 감정인지를 관객에게 되묻습니다. 흥미롭게도 영화 후반, 도시 전역에 걸린 거대한 조이 광고 홀로그램이 K를 향해 그가 이미 알고 있던 조이와 똑같은 말을 건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은 조이와의 관계가 지녔던 특별함과, 동시에 그녀 역시 대량 생산되는 상품이라는 잔인한 현실을 한 프레임 안에 동시에 담아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상품화된 시대에도 그 감정 자체는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지, 영화는 답을 내리는 대신 그 질문을 열어둔 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음악 교체 비화
이 영화의 스코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안타까운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애초 음악을 맡은 사람은 드니 빌뇌브 감독과 <컨택트>, <시카리오>, <프리즈너스>를 함께한 오랜 동료 요한 요한슨이었습니다. 원작의 반젤리스 사운드를 잇는 후계자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약 1년에 걸친 작업 끝에 감독과의 견해차로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공식적으로는 반젤리스의 색채에 최대한 가깝게 작곡했음에도 감독이 만족하지 못했다는 이유가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결별 사유에 대한 언급은 계약상 제한되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음악은 한스 짐머와 벤자민 월피쉬가 새로 맡아 완성했고, 영화는 그 상태로 개봉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한 요한슨은 영화가 개봉한 지 약 1년 뒤인 2018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가 작업했던 버전의 스코어는 끝내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완성된 영화에는 담기지 못했지만, 이 비화를 알고 나면 영화 속 음악을 듣는 감각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마치며: 다시 봐야 할 이유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개봉 당시 제작비 대비 흥행에서는 아쉬운 성적을 남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가를 더 인정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빠른 전개 대신, 압도적인 비주얼과 느린 호흡으로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 영화는 볼 때마다 다른 지점이 눈에 들어오는 몇 안 되는 SF 영화 중 하나입니다. 이번에 다시 보신다면, 화면의 색채와 조이의 눈빛, 그리고 그 뒤에 흐르는 음악까지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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